[김해읍성] 오래 전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어주는 김해의 역사
김해읍성은 김해시 동상동 일대와 서상동 일원에 축조된 조선 세종 때 축조된 평지성이다.
사적지는 역사가 후손을 만나는 공간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특정 공간을 찾는 까닭은 공간에 담긴 역사를 읽고 배우기 위해서다.
지난 2017년 김해읍성의 서쪽 성벽과 성곽을 방어하기 위해 파 놓은 연못으로 해자가 발굴되면서 김해시 전체 읍성 복원에 청신호가 들어왔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됐고, 이후 유적도 도로와 집 건축 등 각종 개발로 흔적 대부분이 사라졌었다.
성벽과 해자 발굴에 앞서 동쪽과 북쪽성곽 유구가 잇따라 발굴된 바 있어 김해읍성의 온전한 모습을 복원하는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김해읍성 주변으로 김해전통시장이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으며,
김해객사 후원지와 김해향교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김해의전통과 역사를 돌아보는 여행코스로 함께 둘러보기 안성맞춤이다.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해자와 옹성은 문종 원년(1451)에 만들어졌고, 고종 32년(1895)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인 여장 931개소,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곳 적대 20개소, 옹성을 갖춘 문 4개소, 우물 28곳 등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김해읍성의 성벽 둘레는 1,950미터이며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령으로 거의 철거되고, 김해시 동산동 818번지 일대 북벽20미터, 높이 2.5미터 정도만 남아 있었다.
《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동문은 동해문, 서쪽은 서해문, 남쪽은 진남문, 북쪽은 공진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북문인 공진문만 재건되어 볼 수 있다.
김해읍성은 동서남북 4대문을 갖춘 평지성이다.
평지성이란 산성과는 반대로 평지에 들어선 성곽을 말한다.
평지성은 산이라는 지형지세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에 불리한 듯하지만 공간활용이나 관측, 수원 확보 등에 유리한 면이 있다.
이처럼 김해읍성은 오랜 세월 김해의 진산인 분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분산성(국가사적 제66호)과 함께 김해를 지켜왔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읍성철거정책이 시행되면서 김해읍성 역시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사라졌다.
조선에 왕이 있었으나,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이 읍성철거정책을 펼쳤고, 김해읍성도 그렇게 파괴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던 다른 읍성들도 일본에 의해 대부분 헐렸다.
현재 복원된 김해읍성은 북문과 옹성이다.
2006년부터 약 2년간 전면 발굴을 하고, 발굴된 자료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에 복원하였다.
긴 세월 오랜 풍파를 견디고 김해읍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은 2017년 김해읍성의 서쪽 성벽과 해자 발굴로 전체 읍성 복원에 청신호가 들어왔다.
발굴된 성벽은 높이 2미터, 길이 23미터이며 남쪽과 북쪽 방면은 인근 주택 하부와 연결돼 있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큰 면석을 사용해 쌓았고, 틈을 쐐기돌로 메우는 등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다.
또한 해자의 석축은 성벽에서 서쪽으로 9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성벽과 나란한 방향으로 확인되었으며 해자의 깊이는 140센티미터 정도이다.
왕의 명을 받아 착한 백성들이 힘을 모아 바위를 다듬어 하나하나 쌓아 올린 단단한 성벽의 김해읍성 주변을 거닐다 보면 그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수 백 년 세월이 흘러 철거되고 복원되는 과정 속에 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김해읍성은 일본에 의해 사라진 우리의 문화재와 조상들이 어떻게 적의 침입을 방어하며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역사 유적지이다.
김해읍성은 대중교통으로 버스 이용 시 김해여객터미널 근처에 있는 봉황역(1002)정류장에서 72번 버스 승차 후 농협김해시지부 정류장에 하차하면 도보 6분 거리이다.
주차는 김해읍성 북문 입구에 마련된 전용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